시간에 대한 두 가지의 생각(후편)  _  202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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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얘기한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 다듬어진 직선적 시간관은 기본적으로 무한한 시간을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의 삶과 고난의 역사는 언젠가 마침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는 날. 결정적인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이란 기대를 전제로 깔고 있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종말론은 기독교에서 상당히 이단시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과학적 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변두리로 밀어내면서 이제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끝도 한도 없이 이어져가는 두려운 그 무엇이 되었고 그로서 좁게는 서구인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불안과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고 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무한한 시간, 영속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지극히 찰나의 일이다. 찰나이기에 덧없다, 그런 삶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다시 불확실한 신앙을 향해 마치 허공에서 점프하듯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했던 키르케고르로부터 시작해서 야스퍼스, 마르셀 등으로 이어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등장했다.

또 이미 우리 스스로가 죽여 버린 신이라든가 운명의 여신에게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것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니체, 삶 자체에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알베르 카뮈, 삶은 그냥 내던져진 것이라고 말한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면서 생겨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안타깝고 절망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적 신학의 시대, 신앙의 시대가 사실상 끝난 것이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많은 신앙인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에리한 과학적 지식 앞에서 부단히 시달리거나 불안해한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는 사라졌고 그 慣性(관성)이 남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단지 한 번에 그친다는 점,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모든 것들과 작별하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실로 힘들게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흘러가서 우리는 결국 죽게 된다는 점이고 그로서 영원히 疏外(소외)되고 망각되어 버린다는 점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면 이제 순환적 시간관에 대해 얘기해볼 때가 되었다.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우리가 달리 어떤 위로와 위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시작해보자.

앞글에서 얘기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들어가 보자. 과학적 시간이 가장 유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무엇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는 점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시간은 늘 되돌아온다. 낮이 되었다가 또 밤이 오고 그러면 다시 아침이 온다. 또 밤이 올 것이다. 데이 앤 나잇, 이게 시간이다. 밤과 낮만이 아니라 달의 朔望(삭망), 즉 차고 이지러지면서 매달 되돌아오며 계절로 봐도 겨울 가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그러면 다시 겨울이 온다. 한 해 또한 가면 다시 온다, 따라서 시간은 늘 같은 길을 되밟아올 뿐이다.  

시간은 그저 一往(일왕)하면 一來(일래)한다. 이게 바로 순환적 시간관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쓰는 ‘해’란 말은 ‘하루의 해’를 말하기도 하지만 一年(일년)으로서의 해를 뜻하기도 한다. 日(일)과 年(년)이 우리말에선 모두 해라고 한다.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같겠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스케일의 차이가 있지 않느냐 하면서.

물론이다. 스케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스케일이 중요한 이유가 뭘까? 하고 따질 것 같으면 우리 삶의 길이가 한정되어 있고 마침내 죽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 눈엔 참으로 덧없는 풀벌레 하루살이이지만 그 놈이 그 하루를 충분한 시간의 길이로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가져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여전히 각 생명체가 시간을 어떻게 감지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하루살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결국 감정 이입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간의 스케일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순환적 시간관은 오늘날 우리 일상 속에도 여전히 배어있다. 친한 사람끼리 만났다가 헤어질 때 한 쪽에서 아쉽다고 말하면 다른 한 쪽에서 오늘만 날인가, 또 만나면 되지!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이 역시 되돌아오는 시간의 관념이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면서도 또 되돌아온다,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磨耗(마모)되지만 한 편으론 또 다시 복원이 된다.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니 옛정이 새롭습니다, 하는 인사말이 그것이다. 옛것 헌것을 새롭게 복원시켜놓으니 그렇다.

오늘 하고 있는 얘기는 시간이 무엇인지 여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간에 대한 과학적 지식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지능과 감성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우리 인간이 시간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니 시간이란 것이 흘러가긴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이게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企圖(기도)들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 나중에라도 이룰 수 있다. 오늘만 날인가! 나중에 또 봅시다, 하는 말이 문자 그대로 말이 된다.

되돌아오는 시간에 대한 관념은 특히 고대 인디아 문명에서 거대한 스케일로 확장되었다. 우주 자체가 永劫(영겁)에 걸쳐 무한히 창조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인디아 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긴 하지만 우주와 시간이 소멸되면 다시 창조된다는 생각은 여러 문명권에서 꽤나 일반적이다. 나아가서 사람 또한 한 번 태어나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기를 거듭하면서 이어진다는 생각, 즉 輪回(윤회)와 轉生(전생)이 더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윤회 전생하는 삶에선 눈앞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또 다른 식의 위로가 주어진다. 業(업)이라 부르는 카르마가 그것이다. 이번 생에서 당신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은 前生(전생)에 지은 업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 이번 생은 힘들더라도 선하게 살면서 복을 지어놓으면 다음 생에선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게 그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썰”이다.

하지만 삶의 고통과 불행을 나름 위로해준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면서 한탄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푸념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되돌아오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죽고 태어나고 살고 또 죽기를 되풀이한다는 생각,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 생에서 꼭 성공할 이유도 없게 된다, 그러면 느긋해진다. 이번 삶이 별로라면 다음 생에서 잘 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 우리가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서 한 평생 잘 살아봅시다, 하는 바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시간이 되돌아오고 삶이 되풀이된다는 기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을 때 우리는 전생에 어떤 관계였기에 이렇게 잘 맞을까요? 하고 찬탄을 하기도 한다. 전생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번 생에서 이루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가까운 이와 가령 死別(사별)할 때 다음 생에 다시 만납시다, 하고 기약을 하기도 한다. 시간이 되돌아오고 되풀이되며 삶 또한 그렇다면 말이다.

되돌아오는 시간관은 이처럼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을 준다. 이 대목에서 20세기 초반의 “앙리 베르그송”이 생각난다. 그는 시곗바늘에 의해 측정되는 과학적 물리적 시간은 우리 의식의 시간, 진짜 시간인 삶의 시간과는 다른 것이니 그 따위 것에 신경 쓰지 말자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과학의 직선적 시간관에 대한 미약한 저항 또는 반항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다시 하는 얘기지만 여전히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없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이 주는 저 많은 유용함을 한껏 누리되 과학의 직선적 시간관에 대해서는 굳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불행해질 것이니 말이다.

이제서야 밝히지만 이번 글 역시 이전의 시리즈 글인 “삶을 견뎌내는 세 가지 방법”과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글에선 또 제목을 바꿔달고 다른 얘기를 하겠지만 그 역시 큰 맥락에선 동일한 주제를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글은 결국 나 호호당이 연구해낸 자연순환운명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 또한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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