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시술대에 누워  _  20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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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던 어금니를 뺐다. 진작 했어야 하겠지만 나는 으레 늦는다. 올 해는 3년간 미루었던 이빨 치료를 해야 한다, 뺄 건 빼고 때울 건 때우고 몇 개는 임플란트로 박고, 연말이나 되어야 끝날 것 같다.

그간 왼쪽으로 주로 씹다 보니 얼굴의 균형이 많이 무너졌고 오른쪽 엉덩이 근육에도 무리가 생겼다. 작년 초부터 미루기 시작한 치과치료가 겨우내 이어지더니 마침내 새 해 春分(춘분)이 되자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끝까지 버틴 셈이다. 이에 작심을 했으니 長征(장정)이 시작되었다.

이빨 치료에서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마취 주사라든가 발치에 따른 약간의 통증 또는 임플란트 봉을 받는 수술도 아니다, 나 호호당에겐 최고의 치과 주치의가 있기에 그런 일은 그 친구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다. 주사를 맞은 뒤 마취가 퍼질 때까지 하게 되는 치석 제거 작업, 꽤나 두렵다, 강한 수압의 찬물이 치주 근처에 닿으면 그 자체만으로 신경 발작이 생겨서 양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말 싫은 것은 발치하고 상처 부위를 꿰맨 다음 지혈을 위해 거즈를 2시간 동안 꽉 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잔뜩 피비린내 나는 거즈가 혀에 닿고 인후를 통해 코로 올라오면 구토를 하게 된다. (그러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살그머니 재빨리 거즈를 갈아 물어야 하는 데 그 또한 부담이다.)

게다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후라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한 데 그 또한 꽤나 참아야 한다는 점이다. 담배는 중독성이 워낙 강해서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면 끊기 어렵다, 이런 것을 왜 배워가지고 고생을 하는지. 예전엔 흡연은 성인 남자의 認證(인증)이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치료하는 시간 내내 겨울 동안 사색했던 불교 철학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집중했다. 그러자 절로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4 세기 경 인도의 바스반두가 짓고 중국의 삼장법사가 한역한 “大乘五蘊論(대승오온론)” 속의 구절인 苦謂生時有乖離欲(고위생시유괴리욕)이 그것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괴로움 즉 苦(고)란 그것이 생겨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다.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겨우내 여러 번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어떤 무엇이 내게 생겨나고 일어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 등지고픈 마음을 가지는 게 苦(고)라고 하니 말이다.

마취주사를 맞고 발치 전에 하는 치석제거라든가 이어서 이빨을 빼는 등등 모두가 고통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이빨이 아파서였다. 그간에 염증이 나서 수시로 뻐근하고 아팠으니 그 모든 것이 고통 즉 苦(고)였음이다.

그러니 이빨을 빼는 수술이나 치료 모두 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건만 그 역시 나름의 고통과 불편함을 겪어야 하니 그 또한 싫어서 참고 참다가 결국 더 이상 있다가는 왕창 더 큰 苦(고)를 겪을 것이 틀림없기에 치과를 찾아온 나였다. 고통 앞에서 나 호호당은 그야말로 비굴하고 옹졸하다.

시술의자에 누워서 눈을 가린 채 어금니가 쑥-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의 말이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바수반두(세친)여, 당신의 말씀 또한 역시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근본적인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삶을 苦(고)라고 했긴 하지만 삶에는 즐거움 즉 樂(락)도 있다. 반대급부도 있다는 말이다. 바스반두는 樂(락)에 대해 樂謂滅時有和合欲(락위멸시유화합욕)이라 했다. 즐거움이란 그것이 사라질 때 다시 만나서 합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않던가 말이다.

하지만 살아보니 알게 되지만 고통이란 것은 그것을 겪을 때마다 힘들다, 어려운 것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이란 그것을 겪을 때마다 그 세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는 모순이 있다는 게 문제, 큰 문제라 하겠다. 삶에 있어 즐거운 날 그다지 많지 않고 괴로운 날이 훨씬 많다, 이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핵심 문제가 제기된다.

삶에서 괴로움은 많고 즐거움이 적다면 분명 밑지는 것인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살고자 하는 것일까?

사는 게 이빨이 아파서 끙끙 앓는 것이고 죽는 게 앓던 이빨을 빼고 염증을 없애는 치료라 본다면 실은 미리미리 이빨을 치료하라고 하는 것처럼 어서어서 확-죽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죽을 때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건 앓던 이빨 빼는 수술이라 여긴다면 잠깐 눈 딱 감고 어디 한 번 죽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생짜로 죽는 게 아니라 안락하게 세상을 여의는 약도 있다는데 말이다.

지나간 겨울 동안 읽고 사색했던 열권 이상의 불교 철학책 속에 담긴 것들을 간략하게  줄여 말할 것 같으면 이빨 계속 아파하지 말고 어서 치과를 찾아가라는 것, 즉 살면서 고생하지 말고 삶으로부터 어서 떠나라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건 염세적인 생각이 절대 아니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득실을 따져보는 얘기, 즉 냉철한 理性(이성)에 바탕을 둔 생각임이 분명하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거즈를 꽉 문 채 계속 생각해보니 왜 내가 더 살고자 하는 바람을 갖는 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인 즉 이건 그냥 본능 때문이란 답이 나왔다. 머리로는 산다는 것이 밑지는 장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작정 무조건 살고자 하는 원천적인 욕망과 바람이 유전자 속에 로직(logic)으로서 심어진 채 태어났기에 살고자 한다, 이게 답이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 또 한 가지를 문득 알게 되었다, 왜 우리에겐 본능이란 이름의 원천적 욕망이 심어져 있는 가에 대해서.  

본능이란 우리의 계산머리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또는 작동한다 해도 수시로 망각하게끔 지상명령으로서 심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똑똑한 척 해도 결국에 가선 소위 ‘깔때기’처럼 “시끄럽다, 그냥 살아, 무작정 살아보라고!”, 이렇게 이래저래 따져본 들 정해진 답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이란 사실이다.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나는 크게 외쳤다. 옛 썰! 무작정 살겠씸더!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집 현관에 들어서니 아내와 아들이 바라보는 터라 약간 지치고 힘든 표정을 지었다, 고생했으니 약간의 엄살 정도는 부려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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