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싯다르타들  _  2020.7.22
새 블로그 주소는 hohodang.tistory.com)   티스토리 블로그엔 자연순환운명학에 대한 더 많은 그림과 동영상 강좌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점도 알려드린다.


자식 낳고 사는 보통 사람의 걱정이란 게 알고 보면 크게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걱정, 건강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식 걱정이다.

예전에야 워낙 자녀를 많이 둔 까닭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걱정도 많았겠지만 한편으론 그 걱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보니 오히려 속 편하게 체념할 줄도 알았던 것 같다. “저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 하는 속담이 그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고 하듯이 크든 적든 먹고는 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녀를 둔 부모로서 평생 염두에서 떠나는 법이 없는 것이 바로 자녀 걱정이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더 잘 되었으면 하는 걱정이고 잘 되지 않으면 당연히 걱정이다. 그건 생명의 논리이고 生殖(생식) 즉 세대를 이어감에 있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까닭에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마에 걱정을 매달고 산다.

그런 관계로 자녀 걱정을 하는 부모가 내게 상담을 신청해올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이 약이니 나중에 좋아질 거라는 정도로 달래주는 정도로 그치고 어지간해선 상담에 응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질병이라든가 장애와 같은 심각한 사정이 있을 경우 상담에 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부모의 답답한 속을 조금치나마 풀어주는 것이 고작일 뿐, 결국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상담을 해도 본인과 직접 얘기를 주고받아야 한 마디라도 나름 의미 있는 얘기를 해줄 수 있는 것이지 부모를 통해 전해 듣는 것은 사실 별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  

얼마 전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상담을 했다. 미국 유학생이었는데 근 10년 사이에 전공을 여러 차례 변경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일러 갈 之(지)자 행보 또는 지그재그 스텝이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으론 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이과를 택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리저리 전공을 변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의 경우 10년씩이나 미국에서 전공을 바꿔가면서 유학을 하고 있다면 가정의 경제적 사정은 당연히 좋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공부만 하고 있을 뿐 사회진출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이 일단은 문제였다.

생년월일시를 통해 사주를 펼쳐보니 그 젊은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대번에 이해가 갔고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젊은이는 운세가 줄곧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올 해로서 동지의 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복한 가정환경이고 나이 이제 서른 무렵에 이런 운을 맞이하고 있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면 나는 그를 싯다르타라고 호칭한다. 나중에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우리들이 흔히 석가모니라 부르는 분 말이다.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운이 오른다는 것과 내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나 호호당은 잘 알고 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어보고 싶은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가진 자라면 그는 운이 상승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원하고는 있지만 그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나 수고가 감당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어떤 곳에 가고는 싶은데 그곳으로 가려면 첩첩한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첩첩한 산을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또 현재 넘고 있는 중이라면 운이 상승하는 사람이고 첩첩한 산이 너무나도 버거워서 다른 생각 또는 타협을 원하고 있다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懇切(간절)한 가 아닌가, 이거야말로 굳이 사주를 보거나 운을 파악하지 않아도 운의 상승과 하락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다.  

그 젊은이는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이 부유하다고 해서 유학 중에 한껏 즐긴 것도 아니요, 부모님들이 최선을 다해 학비를 조달해 주고 있다는 사실,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아울러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 등등 많은 것들을 나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건실한 청년이었지만 하던 공부를 그 사이에 벌써 여러 차례 변경해오고 있었으니 그건 간단히 말해서 彷徨(방황)이었다.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란 다름이 아니라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얻기 위해선 결국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경쟁자들과 싸워야 하고 나아가서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싸우고 싶은 생각을 별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 젊은이가 선천적으로 평화적인 성향을 가져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간절한 욕망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찾아온 젊은이는 이번에 택한 전공만큼은 꼭 마치겠다는 책임감 또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심리는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더 이상 방황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인 것이지 본인의 간절한 목표는 아니란 얘기이다.

그 젊은이가 방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간절한 그 무엇을 염원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라고 하는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에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풍요로움 속에서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생각이 많은 지적인 청년이었기에 삶의 본질적인 괴로움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재능도 뛰어나고 가진 것도 많은 여유로운 입장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주목하지 않는,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삶의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느꼈다는 것이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환경은 나쁘지 않은데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달리 말하면 운세가 하락하고 있는 젊은이를 나 호호당은 싯다르타라고 부른다. 역사상의 싯다르타와 나를 찾아왔던 그 젊은이, 내 눈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우리 주변엔 그렇기에 적지 않은 젊은 싯다르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이기에 그 젊은이의 앞날 또한 싯다르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출가한 뒤 싯다르타는 여러 스승님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수행을 했으나 나중에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였음을 깨닫고 中道(중도)의 길을 스스로 체득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통해 생사번뇌를 떠나 열반에 들 수 있었다.

싯다르타에게 있어 출가하기 전의 세월들은 방황이었지만 출가한 후의 수행 역시도 방황이었다. 출가한 뒤 열심히 깨달음을 찾아다녔지만 보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명칭은 같은 방황이지만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방황은 60년에 걸친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이전의 것이라 하겠고 뒤의 것은 입춘 이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앞의 방황은 간절한 그 무엇이 속에 담겨져 있지 않아서 하게 되는 허무함에서 오는 방황이고 뒤의 방황은 이제야말로 간절한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한 방황이라 말할 수 있다.

찾아온 젊은이에게 얘기해주었다.

자네는 현재 운세가 내리막이기에 방황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가 몇 년 뒤 입춘을 지나고 나면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또 한 번의 힘든 시간들을 가지게 될 것이란 점, 그런 과정을 거쳐 중년 이후엔 제대로 사는 맛을 느끼면서 즐겁고 힘차게 살아가게 될 것이란 점을 얘기해주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얘기는 사는 맛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는 맛을 느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간단하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목표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삶을 뜻한다. 우리들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긴 인생살이는 이런 시간들로만 채워지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시간들이야말로 소중하다.

물려받았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성취했든 상관없이 가진 것이 많은 자는 더 의욕을 내기 어렵다. 그보다는 포만과 권태에 빠져들기가 더 쉽다. 아니면 무모한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 생각해볼 때 나름 달성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또 그를 위해 노력을 아끼고 있지 않으며 때론 뒷걸음질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그 쪽으로 향해서 꾸준히 접근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최고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60년에 걸친 순환의 시간에 있어 그런 때, 즉 의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년이고 좀 더 엄격히 말하면 15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한 번 살다가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에 잠겨 글을 쓰다 보니 밤이 깊었다. 자칫 아침 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서둘러 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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